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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 56~60>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12-26 조회수 :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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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56)>
루카 복음사가는 《(천사가 마리아에게서 떠나간 뒤에 곧바로 차비를 하고) 마리아는 일어서서 서둘러 (엘리사벳을 만나러) 떠났다.(39절)》고 전합니다. (전혀) 걱정스런[동요하는] 마음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곧바로 차비를 하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것은 (엘리사벳을 향한) 배려심으로 충만한 몸짓입니다. (성모님은) 당신 아들의 출산을 준비하기 위하여 집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보다는 먼저 다른 이들에 대한 염려를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들로써 성모님 자신이 이미 당신 뱃속에 계신 주님의 제자가 되셨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 탄생의 사건은 이처럼 소박한 사랑의 몸짓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사랑의 결실은 진정한 사랑[애덕]인 것입니다. 동정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밖으로 향하는’, 절망하지 않는 성탄을 사는 은총을 (주님께로부터) 얻도록 (전구)하십니다. ‘밖으로 향하는’의 뜻은 ‘나’가 우리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당신’과 형제들이라는 ‘너[당신]’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리고, 우리 가운데에 사시고 육화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삼종기도, 2018년 12월 23일)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57)>
(성모님) 우리의 어머니께서는 (주님을 향한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것을 권고[조언]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루카 1,46)》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어쩌면 더 이상 그 말씀의 뜻[의미]을 새기려고 하지 않는 듯합니다. ‘찬송하다’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커지게 하다”, 즉 ‘크게[위대하게] 하다’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주님을 위대하게 하십니다[받드십니다].” (비록) 여러 가지 문제들[걱정들]이 있었지만, 그 순간 (주님을 찬송하려는)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부족함[모자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서 ‘성모찬송’이 흘러나오고, (또) 여기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모름지기) 기쁨이란 예전에도 없었고 나중에도 없을 문제들[잘못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면서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만유 위에) 가장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작은 이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그분께서는 우리를 보실 때마다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보잘것없는] 이들을 바라보시고 사랑하십니다.(삼종기도, 2020년 8월 15일)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58)>
세례자 요한의 탄생 사건 전체는 경이로움, 놀라움, 감사를 담은 기쁨으로 (온통) 채워져 있습니다. 경이로움, 놀라움, 감사. (동네)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성스러운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고, 그래서 (복음은)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루카 1,65). (설명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신앙심이 남다른 백성들은 비록 (그들의 처지가) 보잘것없고 드러나지 않지만,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66절)》하고 자문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 양심성찰을 하면서 자문해 봅시다. 나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기쁩니까?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긴) 놀라움에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놀라우신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곁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경이로움과 감사의 체험’을 내 존재[영혼] 안에서 “맛본적”이 있었습니까?”(삼종기도, 2018년 6월 24일)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59)>
오늘밤 우리(마음)도 역시 성탄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기[알리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오르게 됩니다. 베들레헴은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다윗 고을의) 이름입니다. 오늘 이 “집”에서 주님께서는 인류에게 약속을 건네십니다. (모름지기 이제) 베들레헴은 (인류) 역사의 길[도정]을 (구원으로) 바꾸는[향하는] 대전환의 자리[장소]가 됩니다. 그곳에서, 바로 ‘빵의 집 말구유’에서 하느님께서는 탄생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내가 너희들의 양식[빵]으로 왔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누군가를) 소유[취]하시기보다,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하여 내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먹거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을 먹도록 내어주십니다. 베들레헴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의) 생명을 (자신을 위하여) 소유[취]하려는 자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진리]를 (다시금) 발견하게[깨닫게] 됩니다.(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2018년 12월 24일)

<카톡으로 만나는 우리 교황님(60)>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님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들은 잠들지 않고 밤새도록 깨어있었습니다. 잠들지 않은 채로, 그들은 어둠 속에서 깨어 기다렸고, 하느님께서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셨다》(루카 2,9 참조). (여기서 목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제 베들레헴으로 갑시다》(루카 2,15 참조). 그리고 목자들은 (서로에게) 말한 대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했습니다. 주님, 우리도 역시 (당신을 만나러) 베들레헴에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늘날도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은) 오르막입니다. (그 길을 오르려면) 이기심의 끝판왕 같은 모습을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세속주의와 소비주의라는 (아주 깊은) 구렁 속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목자들에게 그랬듯이) 베들레헴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그곳에 (기필코) 가고 싶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 당신’께서 제 생명의 빵이심을 깨닫게 하소서.(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2018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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